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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이 사람잡는다

  • 자연건강
  • 2009-12-24 16: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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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당이 사람잡다(첫 자연의술(自然醫術)의 체험)
고도산업과 함께 파생되는 각종 공해와 식생활의 서구화가 급속도로 이루어 지다보니 이 땅에도 서구식 성인병 환자들이 자꾸 늘어나게 되었다.
1970년 한국니시회(韓國西會-현자연건강회)가 창립되고 이어서 급변하는 사회환경과 함께 건강법의 연구와 보급의 필요성을 공감하게된 이들이 자주 모임들을 갖게 되었다. 건강회가 활성화 되면서 본인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건강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초급과정으로 2급 지도사(指導師) 과정교육이 실시되고 이어서 자기 외에 남들을 지도 할 수 있도록 1급지도사 과정 교육도 실시하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 본회를 비롯하여 지방분회가 속속 설립되면서 지도사 양성은부산,광주,대구, 전주,대전, 강릉,원주,인천 등으로 전파 확산되기에 이르러 지난30년 동안 1,2급 지도사가 무려 7천 여명 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 할 수 없다.
그 당시 간장 병으로 투병 중에 있었던 필자는 1979년 한국자연건강회 에서 최초로 실시한 건강법 지도사양성교육과정에서 제 1기로 2급 지도사교육을 받고 연이어 그 해 7월25일에는 역시 제1기로 1급 지도 사 교육도 받았다.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이 건강상식의 절대 필요성을 느껴서 였던지 건강교육이 있다하면 언제나 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까지는 모두들 전적으로 문헌에만 의존하는 건강법에 만족해야 했는데 비로소 실천하는 건강법을 익히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 후에 필자는 니시식 건강법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어 더욱 열심히 그리고 끈기 있게 실천한 결과 만성간염에서 벗어나 건강이 크게 향상되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에 수년간 체재하다가 귀국한 배성권 초대회장이 그곳에서 틈틈히 수집한 니시건강법의 각종 자료들을 회에 제공함으로써 번역서 들이 계속발간 되었다. 그에 따라 회원들이 여러 가지의 건강정보를 공유할 수 가있었는데 그 분위기를 적극 활용하여 회의 건강 의술이 점차 축적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임상해본 사례들이 빈약한 상태여서 누구 한 사람 체험담을 비롯한 니시건강법의 실천결과를 회원들에게 자신 있게 증언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니시 건강법으로 권위 있게 타인의 건강을 직접 다루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자들이 찾아와 상담요청을 하며 도움을 바라지만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고작일 뿐 임상경험이 전무한 우리들로서는 솔직히 속수 무책이었다.
당시 환자였던 필자로서는 자신의 병도 아직 못 고치면서 남에게 무엇을 실천하라며 강력하고 자신 있게 권유할 수 없었다. 답답한 하루 하루가 흘러가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다만 경침과 감잎차, 건강서적 몇 가지를 안내 하여  보급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따라서 회는 한동안 무기력한 상태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런 상태를 오래 끌 수는 없어서 급기야 임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백방으로 숨가쁘게 뛰면서 1980년5월에는 회의 사정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일본 니시건강법의 창시자 니시가쓰조 선생의 측근이었던 나까니시 선생을 초빙하여 회원들에게 체모관측법을 비롯한 각종 건강법을 수일간 수련케 하였다. 그리고 1983년에는 가또박사가 초빙되어 우리들에게 근육전도법과 역시 체모 관측 법을 또 강의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카쇼 박사와 와다나베 박사 등도 초청하여 니시건강법 의술의 보급과 실력향상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학륜 총무와 역시 고인이 되신 김흥국 선생을 따라 그때까지 말로만 들어왔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지었다는 어느 아파트라에 가게되었다. 강남의 허허 벌판에 뾰죽하게 높이 솟은 몇 채 안 되는 아파트가 막 들어섰을 때였다.
땀을 닦으며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 곳은 어느 부잣집 아드님이 홀로 누워있는 병간호 실 인 것 같았다. 그분들은 아들의 병간호를 자기 집에서 하지 않고 아파트를 전세 내어 병막(病幕-전염병환자 격리수용하는곳)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분들의 신분은 나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그 환자는 명문 S 대학 3년 생이었는데 부친이 굴지의 제분회사 사장님이라고 하였다. 결핵성 복막염으로 고통받고 있던 그 학생은 S대 병원 내과과장인 삼촌에 의해서 입원치료중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던지 마지막으로 자연요법에 맡겨보자며 우리들을 찾았던 모양이다.
 환자의 가족들과 선배들은 아는 사이인 듯 했는데 임원들 중에 필자이외는 직장 관계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때에 마무리 투병에 열중하고 있던 필자를 그 환자의 지도에 투입하려했던 것 같았다. 자연건강회에 상근하기 위해서는 환자를 다루는 체험과 그 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건강법의술의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환자는 부축을 받아야 겨우 화장실을 출입할 정도로 중증이었다. 이뇨가 잘 안되어 몹시 부어 있었는데 그렇게 많이 부어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로 부었고 생식기도 탱탱 부어서 내부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가늘게 뻗은 동 정맥 모세혈관들이 보이고 요도를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속을 보는 듯 하였으며 소변 나오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고환의 모양도 선명하게 보였는데 만일 손톱으로 잘못 건드렸다가는 물이 꽉 찬 얇은 풍선처럼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선배들은 나에게 환자 다루는 체험을 쌓아야 한다며 격려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필자는 선배들이 나를 똥개훈련 시키듯 한다는 불쾌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도 했고 건강하지도 못한 나를 곤경으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닌가 하여 서운하기도 했으나 한편생각하면 자연건강법을 깊이 익히기 위해서는 그 일을 마땅히 체험해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기로 했다.
그 선배들이 건강지도자를 양성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었다.
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각탕을 시키기로 했다. “니시식 건강원리 실천보전”에는 열이 나고 부종이 있을 때에는 땀을 내어야 하므로 각탕을 하도록 되어 있다. 43도로 데운 물을 탕에 넣어 발을 담그고 편히 눕게 하였다. 필자는
제도권 의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니 의사가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돌 파리의 자격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그것도 아주 중증의 환자를 문외한이 다루게 되었던 것이다.
의과대학을 나와 인턴을 거치는 등 실무경험 수10년, 그래서 대학병원의 전문의가 된 과장이 자기 친 조카의병을 못 고쳐서 자연건강법에 맡겼다니 말이 아니었다. 필자는 늘 나의 병과 관련하여 이미 오래 전에 현대의학의 실정을 알았기 때문에 현대의학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갔다.
각 탕을 시작하여 20분이 지나면 땀이 난다고 했는데 환자의 몸에서 땀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무더운 여름철에 각 탕을 하지 않아도 땀이 솔솔 나고 있지 않았던가. 초조한 가운데 필자는 진땀이 났다. 다시 문헌을 보니 역시40분의 각 탕을 해야했다. 장시간인 셈이다. 10분만 더 또 10분 더 하다보니 어느새 각탕을 시작한지 40분이 되었다. 그러다 드디어 환자의 콧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땀이 안 나더라도 40분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중지시켜야만 했다. 그것은 필자가 타인에게 각탕을 처방하여 처음 성취감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 다음이 문제였다. 환자가 소변을 보고싶다고 했으나 일어서지를 못했다. 각탕을 하기 전에는 부축하면 일어서서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았던가. 각탕 40분 동안에 탈진하여 기진맥진했던 것이다.
불안했다. 의사도 아닌 내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중한 환자에게 땀을 내는 각탕은 무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환자의 용변을 모두 받아내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자연요법을 하다가 오히려 병세가 오히려 악화된 셈이었다. 선무당이 사람잡는 다는 불길한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사실 선무당의 자격도 없지 않았던가. 자연요법을 실행함에 있어서  중환자의 상태도 세밀히 고려하지도 않고 문헌에 따라 그리고 선배들의 말만 듣고 교과서적인 치료를 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었다.
워낙 환자의 병세가 중하기도 했지만 당시까지에는 자연건강법의 실천 경험들이 없었고 그 의술의 축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날 이 후 필자는 애석하게도 그 환자를 영원히 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죄책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인이 된 그 학생의 명복을 새삼 기원해 본다.
그 중환자를 통하여 실패한 그때의 따끔한 교훈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속담을 통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위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축적된 건강의술은 그 후 회에서 20여 년 간을 봉사함에 있어 나름대로 두고두고 되새겨지는 커다란 경책(警策)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영규 명예회장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6:06:40 2008년 7,8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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