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6면-불교와 니시의학
- 자연건강
- 2009-12-21 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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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NISHI의학
자연건강법
Katsuzo Nishi
7. 불교를 니시의학에서 보면
부처님은 사고(四苦)를 벗어났기 때문에 사고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중생에 대해서는 사고라고 설하신 것이다. 우선 태어나는 것이 고(苦)이다. 태어날 때는 아무도 그 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생활의 고를 말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점점 나이를 들게 되면, 이것을 노쇠라고 생각하면 서글프게 되고, 고생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병을 앓는 것도 고, 이것은 현대의학에 맡기고 있는 동안은 고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고가 있다. 이들 생로병사는 지금의 의학에 의지하고 있는 한 그것은 확실히 사고(四苦)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니시의학은,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사락(四樂)으로 보는 것이다. 팔고(八苦)는 생로병사 외에 애별이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 니시의학은 이것을 팔락(八樂)이라고 말하고 있다.
8. 삼법인(三法印)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불도와 외도(外道)와의 교리의 차이를 알기 위해 삼종의 다른 것으로 삼법인이라는 것을 정한 것이다. 물론 용수(龍樹)보살이라든가 석가모니불이라든지는 이미 일법인(一法印)이나 많은 불교연구자들에 대하여는 삼법인으로 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석가의 비범한 점이다. 그래서 삼법인의 우선 제1의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이다. 즉 제행은 무상하다는 점, 그래서 도장을 우선 먼저 제1로 찍은 것이다. 제행은 무상하다. 일체만물 있는 모든 것은 돌아흐른다. 일체는 이동하여 변해간다. 이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모든 일체만물은 옮겨지고 변하니까 제행인 것이다. 그것은 항상 같지 않다. 제행은 무상이다. 그리고 그 옮기고 변하는 것에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에 대하여는 일체를 놓고 나(我私)가 없다. 무아이다. 그리고 삼법인의 제2는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이다.
『법구경(法句經)』의 240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악은 마음에서 생겨서 도리어 자기 몸을 해치고, 쇠는 녹이 슬어서 도리어 자기 몸을 썩힌다」
이렇게 읽는 것은 나의 불교연구는 모두 독학한 것이므로 혹은 나와 전문가 사이에는 읽는 것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도기와다이죠 문학박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몸에서 나온 때에 의하여 쇠는 삭아버린다. 길을 잘못 걸어온 업(業)도 내가 하고 나를 망친다」
또 다음과 같이 번역한 것도 있다.
「녹은 쇠로부터 나와서 그 쇠를 상처나게 하는 것과 같이, 부정한 행위는 나의 업에 의하여 가쁜길로 가게 한다」
여기에 철광석이 있을 때 이 철광석은 녹슬고 있지 않으므로 지구의 표면과 완전히 같다. 즉 지구상에 변화없고 안정되어 있다.
이 철광을 불에 넣어 두드려서 단련하여 그 속에 있던 수분과 산소를 분해하면 완전한 철재가 되어 우리 인류에게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철재는 인류가 잘쓰고는 있으나 여기에 한가지 녹방지 조처를 하지 않으면 제행은 무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의하여 바로 공중의 산소와 수분을 흡수하여 전의 철광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주의하지 않으면 삼법인의 제3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안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삼법인에는 틀림이 없다.
난치병 극복 체험기
유방암 극복에 생채식 소식요법
J. C. K
나의 성장기
나는 달을 못채운 미숙아로 태어났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배와 함께 바다의 물거품이 되셨다고 하며, 어머니는 일을 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나를 귀여워 하셨으나 또한 엄격하셨다. 4세경에는 숙부님들도 몸이 약한 나를 위해 애쓰시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의 식생활은 어떠했는가 하면 꽤 큰 도시였으나 밭도 있었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처럼 무밥이나 해초밥 같은 것은 먹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흰밥에 된장국과 깨소금친 반찬이었고, 며칠마다 생선을 먹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흰 쌀밥 외에는 고오다 선생님이 추천하시는 전형적인 일본식사였다. 흰 쌀밥만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없이 자라는 나를 가엾게 여겨주신 분들의 덕분인 줄 안다. 그런 병약한 나도 건강해 졌다. 그렇지만 역시 육식을 모르는 채식 편식의 생활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4월, 나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식생활은 그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식생활에 있어서도 서양식이었고, 고기를 싫어하는 나를 고기를 먹게 하려고 애쓰셨다.
과식의 시작
시대 변천에 따라 식생활도 전과는 너무도 달라져 갔다. 즉석에서 라면, 소세지. 햄, 햄버거, 카레, 불고기 등 우리 집도 육식문화 첨가물 문화에 흠뻑 빠진 생활이었다. 싫었던 고기도 어느새인가 즐기는 사람이 되고 소식의 유·소 시대에서 대식의 소녀·청춘시대로 변했다. 학교생활에서는 식물학, 영양학, 요리의 실습을 즐기고, 가정과 선생님의 사랑도 받고, 1일 30품목 먹기의 중요성을 단단히 몸에 익혔다.
그후 결혼하여 아이를 둘 낳고부터는 어머니로서 주부로서의 일은 무어라해도 먹는 것이었다. 「생활의 수첩」 「영양과 요리」는 고교시대부터 애독자이고 「식품분석표」는 빠트릴 수 없는 성서였다. 아이들이 감기가 들면 뜨거운 스프, 아이스크림, 고기와 야채볶음 등으로 아이들이 건강해지도록 애썼다.
이와 같이 해서 40대 후반이 되어 남편도 중년 비만이 되었고, 체중은 57.5kg이었다. 156cm의 키였으므로 지금 생각해보면 거짓말 같다.
그 즈음부터 어깨결림이 심해지고 매일 같이 정료원이나 정체원에 가게 되었다. 심할 때는 머리를 뽑아서 탁상에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으로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 어깨결림이 원흉이었던 것이다.
3. 니시식, 고오다식 건강법 입문
2002년 9월 3일 나에게 있어서는 운명적인 날이 되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조직 운영하고 있는 NPO환경회의가 고오다 선생을 초청하여 강연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강연은 하나에서 열까지 나에게 녹아들어 「그랬었구나」 하고 납득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흔히 말하는 갱년기장해라고 했다. 현대의학의 선생에게 「선생님 그렇게들 말하는데…」 하고 말하니 「다나카 부인 당신이 갱년기장해의 전형입니다」라고 도리어 반박당했다.
치료도 안되고 아무래도 납득이 안되는 나에게 있어 고오다 선생의 말씀은 참으로 구조의 손길로 다가왔다. 그리고 참으로 행운이었던 것은 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병의 근원은 발의 고장 특히 솔렐씨병 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나는 고오다 선생께서 받은 「양생식」을 확실히 지켰다. 친구들에게는 「다나카도 어린애」라고 비웃음을 받았으나 그것이 계속할 힘을 주었다.
나의 투병기
운명이란 무엇인가
S.M.H(34세)
필사의 투병생활
같은 날 진찰받은 환자들 중에서는 가장 엄격한 메뉴였다. 병원, 약, 의사에게 의지해 고쳐주기를 바라던 생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고쳐가는 생활로 들어가 나는 병과 곧바로 대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한달쯤 지나니 머리에 습진이 나타나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많이 빠졌다. 아픔은 여전하고 밤에는 배가 땡기고 잘 수 없어 부지런히 붕어운동을 했다. 4개월이 넘어서는 체중이 10kg 빠지고 욕실에서는 현기증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태까지 37.5。였던 체온은 여름이 되니 매일밤 39。 까지 올라가고, 숨이 가빠 뜬눈으로 아침을 맞는 날이 있었고,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여하간 그때의 나는 저녘부터 밤동안 나타나는 증상과 싸우는데 체력이 다하여 아침에는 지쳐서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다.
육체의 부조화가 그럴 뿐 아니라 서투른 투병생활에 나도 부모님까지도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이 밀어닥친 난치병으로 가족도 나도 「왜」라는 생각과 「얼마나 걸려야 나을까」 이런 불안감에서 주체 못한 감정이 충돌되고, 상처도 내게 되었다. 왠만하면 밝게 웃고 지내고자 가족 앞에서 친구 앞에서 전화에서도 힘썼다. 그래도 때때로 어쩔 수 없이 슬퍼지고 눈물을 감출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좀더 강해져야지 그러면 안된다」고 꾸지람도 들었다.
1년 365일 순간적이라도 마음 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그리 많을까. 어머니에게도 불만이나 울분이나 눈물을 보여서는 안될 것인가. 몸을 마음대로 할 자유도 없고 마음조차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도 생각했다.
계절만은 달음박질쳐 갔다. 나만이 시간 밖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언제나 대학원에 가게 되나 조급하고 앞이 안보이는 터널을 더듬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하루하루 감정의 평온보존에 힘썼다. 미칠듯이 몰아치는 격정은 주문(呪文)과 기도로써 가라앉혔다. 차례로 나타나는 고통의 증상 더욱이 병차체가 좋아지는 실감은 없고, 요법자체가 주위에서 이해되지 않고 「대체 그래 가지고 되겠느냐」고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안은 있어도 흔들림은 없었다. 첫째는 이 요법은 식사와 운동을 주간으로 하여 몸에 특별히 해가 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점, 약의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또 고친다고 무엇인가 사야 하는 등 상업적인 점이 전혀 없었다. 이제까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얼마나 많은 것에 돈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수입이 없는 나로서는 돈이 안드는 이 요법은 오래 계속할 수 있었고,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낫는다고 말해준 사람은 고오다 선생 단 한 사람 뿐이었으므로 이 길을 갈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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