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면-자연건강상식문답
- 자연건강
- 2009-12-20 14: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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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건강상식 문답
Q. 근본으로 되돌아가 생각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A. 최초로 영양학의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러는데는 사실 여러분이 어디로부터 생겨났는가, 또 어떻게 우리들의 몸, 생명이 키워지고 있는가 하는 생명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 몸의 각 부분에 영양이나 산소를 운반하고 있는 것은 혈액이다. 그 혈액은 동맥에서 말단의 모세혈관으로 흐르고 다시 정맥을 지난다. 이런 순환을 하고 있는데, 그 말단의 모세혈관의 크기는 어떤가 하면 대체로 본인의 머리카락보다도 가늘다고 한다. 이렇게 가늘게 가늘게 갈라져 가는데 그 수는 약 51억쯤이 된다고 한다.
우리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이 모세혈관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는 것은 이 51억개의 모세혈관을 제대로 활동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서식에서는 모관운동이나 풍욕 냉욕을 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세혈관의 1개에 대해 영양을 공급받는 세포의 수가 7만 5천~8만이 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포가 사람의 몸에 있는데 전체로는 어느 정도 되는지… 좀 계산이 안된다.
흔히 「저 사람은 ‘단세포’다」라는 등 하지만 실은 인간은 정말 ‘단세포’인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말하면 놀랄지 모르지만 단세포로부터 발생하여 성장의 과정에서 분화하여 이만큼의 수로 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로는 단세포인 아메바도 여러분의 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단세포인 아메바가 모인 것이 인간의 신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즉 건강법을 생각하는 데도 어떻게 하면 세포의 하나하나가 완전히 건강하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작은 레벨의 일이지만 중요한 일이다.
Q. 마이크로(micro) 세계와 매크로(Macro) 세계의 공통 사항을 말씀해 주십시오.
A. 다만 막연하게 무엇을 먹으면 좋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작은 레벨’의 것을 생각한다. 마이크로의 세계에서 이치에 맞는 것은 매크로의 세계에서도 맞는 것이다. 이 ‘공통 사항’을 파악하고 실천해 가면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강법이 실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통 사항’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생명의 탄생’에 도달한다. 생명의 탄생은 바다로부터이다. 최초는 바다 속에서 단백질이 생기고, 단세포로부터 이윽고 어류가 된다. 육지로 올라간즉 파충류나 포유류로 되었다. ‘어머니인 바다’이다. 그래서 바다의 상태와 신체의 체액은 같다. 실지로 우리도 태아시에는 어머니의 자궁 속의 양수라는 ‘바다’에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체액과 바닷물의 성분은 같다. 바다의 성분〔바다의 생물―고기, 고래 포함―도 성분으로 포함해 생각〕의 60~70%는 물이므로, 체액을 바르게 유지한다는 것은 수분을 60~70%로 정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마신다는 것은 생명의 대원칙이다. 아메바도 세포도 그렇다.
바닷물과 체액이 같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불가결의 것은 염분이다. 남에게 건강을 물을 때 「소금의 가감」은 어떤가라는 뜻의 말이 있는데, 이는 염분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바닷물을 물로 4배로 묽게 하면 성분의 비율은 변하지 않고 체액과 같은 농도로 된다. 물이나 염분이 필요불가결인 것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물은 신체의 근원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버리고 삽시다
이 영 규
필자가 30여년 전 중병으로 절망 속에서 투병할 무렵 여러 사찰을 두루 찾을 기회가 있었다. 그 즈음 강원도의 어느 산사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로 기억된다.
한 노승에게 내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노승은 나에게 대뜸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천학(淺學)인 나로서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그 뜻을 몰라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가운데 인생의 비탈길을 힘겹게 허덕이던 때였으므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머리끝까지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스님의 그 말이 나에게게는 동문서답(東問西答)으로 들릴 수 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그야말로 알아듣지 못할 선문답(禪問答)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승은 나에게 불필요한 마음속의 앙금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 분수(分守)에 맞지 않는 과욕으로 빚어진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어서 내 딴에는 한동안 정신적 갈등 속에 마음을 비우기 위해 무엇인가 버리는 흉내를 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보도에서는 외국 잡지에 난 “삶을 단순하게 하여 인생을 바꾸는 법” 50가지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안 쓰는 물건 버리기”라는 대목을 읽으며 그때 산사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노승의 한마디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문제였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물질을 버리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닌가 싶었다.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니 이 또한 생각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여 대량으로 생산된 물품들이 봇물 터지 듯 출하되다보니 미쳐 소비가 안되어 넘쳐나고 있는 실정에 있는 것 같다. 필자의 경우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예전에 미쳐 겪어보지 못했던 요즘과 같은 엄청난 변화에 정신 차릴 겨를이 없다.
많은 가정에서 남아도는 생활용품들을 이제는 쌓아둘 곳이 마땅치 않아 처리가 곤란하고 그 때문에 물질 만능 시대에 엉뚱하게도 스트레스를 겪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따른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물질만능 시대에 있는 곳은 그렇게 많이 있지만 일부 없는 곳에는 또 없다. 한동안 겪어야 할 빈곤과 부의 물질적 비등(比等)현상이라고나 할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시대에 새것이 구형이 된 아날로그 제품들을 모두 어찌 할 것인가.
필요한 만큼 하나씩만 가지고 있어도 될, 같은 목적의 가전제품들이 한 가정에 여러대씩 있다. 시계나 TV, 컴퓨터가 방마다 비치되어 있는 집도 있다.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은 심지어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가족수대로 모두 갖추고도 구형은 남아도는 집도 있을 것이다.
그뿐일까. 한번 입고 오랫동안 걸어둔 옷과 덮지 않고 쌓아둔 침구, 잠깐 신고 보관해 둔 신발이 몇 켤레나 될까. 그래도 이제 새롭고 편리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또 사재기(쌓아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곧 유행이 지나면 깊숙한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오래 사용해 마모되었거나 고장이 나고 헤어져서 못쓰게 된 것들이 아니다. 새것과 다름없는 것들이다.
그 옛날 귀한 시절에는 오래 쓰던 헌 물건도 잘 보관해 두면 훗날 쓸모가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나이든 이들은 그 시절을 생각하여 자꾸 보관해 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쓸 수 있는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도덕적으로 죄악시했던 게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명예회장)
듀이 박사의
조식무용론과 단식요법
E.H. Dewey
병마에 시달린 반평생
시골에서 생장하여 사과나 배, 복숭아 등의 달고 신 것을 좋아했더니 나는 아주 배가 불러도 이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었고, 과일의 계절에는 나의 위 속은 언제나 과일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앉아서 먹고 있을 때는 미각이 일시에 자극되기 때문에 언제나 과식하고 그러하고도 오히려 배부름을 느끼지 못했다. 그 벌로써 결국은 소화불량이 되고, 그 중에도 12지장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이래서 가스가 쌓이게 되고 그 압박 때문에 심장은 고통스럽고, 호흡은 불충분하게 되어 혈액에 보낼 공기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는데 이른 것이다. 위(胃)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거기에 언제나 권태감이 있고, 여력은 어디에서나 느낄 수가 없었다. 나의 최선의 노력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지적(智的) 명정(銘酊)의 결과여서 모든 직접적 결과로서 언제나 그것에 상응하는 피로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래서 신체가 쇠약하니까 나는 될 수 있는대로 흥미없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기의 써서 없어져 버린 전지(電池)의 보충에 온 힘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나와 같은 증상을 어떻게 하여 생리학적으로 회복시키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오늘날 어느 교과서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 집의 아침밥은 정말 굉장한 것이어서 햄이나 소세지나 닭고기나 베이컨이나 고기가 없으면 전혀 먹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나는 정말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병실에서의 건강의 진화를 통한 나에게 주어진 새생명에 의해서 수년간을 저지시켰다. 그 건강의 진화는 의업계(醫業界)에 영광을 가져오게 하는 전조라고 보여지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해가 거듭할수록 위의 내부에서의 활력의 낭비 때문에 더 신경쇠약으로 괴로워 해야 했다.
나의 벗은 나의 처참한 안색을 보고 적잖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을 북돋워 주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래서 조식폐지는 생겼다
우연히 나는 길에서 한 사람의 옛 친구를 만났다. 그는 그때 마침, 그가 지금까지 체재하고 있었던, 유럽 방면의 일상의 음식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가 곧 말하기 시작한 것은 나의 처참한 얼굴에 대해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가 있었던 저 쪽의 대도시에서는 조식(朝食)은 모두 아주 가벼운 것을 드는 것이 습관이고, 빵 1조각에 커피 한 잔 정도지”라고. 그때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는 듣고 있었으나 그것이 깊은 고찰의 값어치가 있는 암시가 그 속에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때는 왔다. ‘절호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느날 아침, 나는 보통의 건강상태였는데 아침이 먹고 싶지 않았다. 전날밤 필요치 않은 이상한 음식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활력을 낭비하여 전반적인 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술꾼이 해장술을 찾는 것과 같이 아침의 커피를 찾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 아침은 커피만으로 끝냈다. 그랬더니 몸이 매우 유쾌하고 상쾌하여, 심신에 에너지의 왕성함을 느꼈다. 나는 이미 청춘시절에, 매일의 식사를 엄청나게 많이 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무의식의 행복감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아침과 같은 기분은 그 시절 이후 지금껏 없었던 일이었다.
그 다음에 먹은 식사는 예민한 미각과 소화력을 가지고 섭취되었다. 이것 또한 새로운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오후는 오전보다 못한 것이었다. 이 체험은 참으로 훌륭했기 때문에 나는 조식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나의 활력이 부활되고, 모든 친구들이 놀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식폐지론은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그때까지 먹고 싶은 조식을 중지하라고 권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1일 3회의 식사를 그만두라는 등의 말은 조금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였다. 내가 주장한 것은 급성의 질병 때문에 식욕이 전혀 없어졌을 때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내 자신의 경우에 있어서 그 갱생(更生)하는 정도가 매우 신속하고 현저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이 치료 방법을 서로 알려 주고 받기에 이르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친구로부터 친구에게 전달되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7:34 2005년 10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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