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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6면-영친왕가와 니시선생의 비화

  • 자연건강
  • 2009-12-20 14: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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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가와 니시 선생의 비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씨가 향년 74세로 지난 16일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서거했다. 이 호텔은 바로 74년전 그가 태어난 이왕가 저택이 있던 곳이다.
그는 아버지 영친왕과 일본인 이방자(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미국인 줄리어 여사와 결혼했으나 후사(後嗣)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했다. 이런 비운의 왕가에 태어난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는 한평생 한국과 미국, 일본을 오가며 외로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죽음도 슬하에 자녀 하나 없이 외로운 최후를 마쳐야 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그의 어머니 이방자 여사는 전 일왕의 아내로 간택을 받을 뻔했는데, 건강 진단 결과 불임의 가능성이 짙다는 이유로 그를 후보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그 대신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황태자 이은과 결혼을 시켰다. 그것은 양국 왕실간의 유대를 튼튼히 한다는 미명 아래 조선 왕실의 대를 끊어 놓겠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방자 여사는 결혼 이듬해에 첫아들 진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영친왕 부부의 서울 나들이 길에 이름모를 급성병으로 생후 8개월만에 죽었다.
그후 방자 여사는 임신과 유산이 이어지기를 10년, 1931년에 꿈에 그리던 왕자 구를 순산했다. 그리고 방자 여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아,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조선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이 아이가 튼튼히 자라서 조국 땅에 굳건히 서게 되기를…”
그러나 이구씨의 인생은 어머니의 소망처럼 그렇게 순조롭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유랑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슬픈 황세손이 되고 말았다. 그는 미국 MIT대에 유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한 때는 뉴욕에서 건축 사무소에 근무한 일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대한민국에 좋은 건물을 많이 짓고 싶다”고 하며, 건축 스케치를 여러점 남겼지만 끝내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74년의 삶은 몰락한 왕조의 슬픈 운명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비운의 황세손 이구씨의 죽음을 계기로 영친왕과 니시와의 교류를 재조명해 보려고 한다.
니시가 자연건강법을 창안할 때 서양원서 6만여권과 동양 한적 1만권을 섭렵했다고 하였다. 그 중에는 퇴계 선생의 저서(「西勝造傳」 P. 75)와 조선의 무속, 민간요법, 민간신앙 등 기타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자료들을 참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라틴어, 조선어, 영미어, 독어, 불어 러시아어, 중국어판 성서를 활용했다는 기록(「NISHI醫學」 Vol.16 No.12)도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7만 3천여권이나 되는 그 방대한 문헌에서 발췌한 자료집 「 NISHI醫學原論」 에도 영, 독, 불어 등으로 된 것과 한문으로 된 우리 것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니시가 당시 볼모 생활과 다름 없던 영친왕가에 출입하여 영친왕과 니시가 각별한 사이였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친왕과 니시의 숨은 비화를 단편적이나마 여기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영친왕이 지금의 동경 아카사카에 있는 프린스 호텔 자리 있던 이왕가에서 니시를 불렀다. 그리고 당부했다.
“니시, 마사코(英親王妃)에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게 지도해 다오.”
“그러면, 어디 거실을 한번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2층의 침실로 올라가 보니, 주위가 모두 복도로 되어 있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4명의 보초가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니시는 그 파수병을 전부 내려 보내도록 말씀드렸다. 그리고 창문을 완전히 활짝 열어 젖히고 공기가 잘 유통하게 하고 침상은 평상(平床)으로 했다. 그렇지만 니시는 자기의 지도로 비전하가 잉태하시게 되면, 혹시 국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심중에서, 당시 하야시 겐타로라고 하는 궁내성 사무관에서 여러가지 사정을 물어 보았다. 이제 십년이 다 지났는데, 그러니까 저렇게 왕자를 보시고 싶어 열망하고 계시는데 한 아기쯤은 괜찮지 않겠는가 하여 지도를 해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전하께서 잉태를 하셨지만, 니시는 일체 침묵을 지키다가 4개월째가 되어서 처음으로 “이제는 잉태하신 것을 알려도 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때 시의(侍醫)를 비롯하여 궁내성에서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쨌든 동대(동경제국대학) 교수가 매월 진단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몰랐으니까 큰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4개월이 지난 이상에서 유산을 시킬 수도 없었던지, 그 사정은 니시가 잘모른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12월 29일 산기가 있자 바로 니시에게 전화가 걸려와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영친왕가에는 호리고시라고 하는 산파가 출입하고 있었다. 미리 “왕자가 탄생하시면, 평상 위에 벗긴 채로 1시간 40분을 그대로 뉘어 두십시오.” 일러 놓았지만. 결국은 도중에 그 호리고시라는 산파가 울음을 터뜨려서 1시간 20분으로 끝나고 말았다. 방의 온도는 화씨 50도에서 55도의 사이를 오르내리도록 하여 놓았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12월 29일에 났으니까 2월 10일 경에 궁내성의 사또시의장이 오라고 통지가 와서 갔더니, 시의장은 없고 젊은 야마가와라는 시의가, “니시 선생입니까. 이왕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로 수고가 많습니다. 앞으로는 일체 손을 떼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서
“손을 떼라니 무슨 뜻인가요. 이왕가에는 이제 출입을 말라는 뜻인가요.” 하니
“아니 왕자 전하의 일에 대해서 손을 떼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하아 여러가지로 사정이 있어서 역시 전문의 의사에게 전부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동대의 모교수에게 맡기기로 되어, 시중들 사람이 왔는데 다섯자 대여섯치도 더 될 것 같은 큰 키의 여의(女醫)가 왔다. 그런데 그 3월 중순 경이 되어 전하께서 곧 들라는 전갈이 와서 니시가 들어가 뵈니,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계셨다. 보니 왕자는 정말로 뼈와 가죽만 남아서 내일 10시경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니시, 이거 어떻게 할 방도가 없겠는가.”
“이것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왕자를 정상 발육 선상까지 올리는데는 아무래도 3주간의 일수는 걸려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좋아한 것은 동대의 교수로서 여의와 얼굴을 마주 보고 혀를 쑥 내밀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잘도 책임을 니시에게 뒤집어 씌우게 되었군.”
그것을 꿈에도 모르는 니시는 3주간 왕자를 맡아 보기로 되었다. 그래서 바로 니시는 부하 중에서 12월 25일 전후에 출산한 부인을 3사람을 추천하여 그 부인들에게는 떡을 해 먹이고, 감주를 먹이고, 생야채를 먹여서 유모 노릇을 시켰다. 다만 그때에 먹이는 젖의 양(量)이 문제인 것이다.
마치 왕자께서는 단식(斷食)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로 마르고 쇠약하여 거의가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니시는 서의학 단식법에 있는 그대로를 응용하였던 것이다. 먼저 좌고(坐高, 앉은 키)를 쟀다. 그것이 30센티라면 좌고를 제곱한 것이 장(腸)의 면적이다. 이 아기의 장의 면적은 900평방 센티미터가 된다. 그래서 장의 면적의 2분의 1그램의 젖의 1일의 적량(適量)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의 면적이 900평방 센티의 아기는 900의 반, 450그램이 1일의 정량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을 먹이면 도리어 영양 과잉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3인의 부인의 젖을 번갈아 먹인 결과 한 부인의 젖이 맞아서 그때부터 점점 성장해 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계산해 낸 양 이상의 젖은 절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아기가 먹었느냐 하는 것은 먹일 때마다 그 전후의 아기의 체중을 달아 보면, 먹는 만큼의 양이 나올 것임으로 그 합계가 가령 450그램이라면 450그램이 되고, 그 이상은 일체 먹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레저레 하고 있는 동안에 왕자의 좌고는 점점 커져서 마침내 45센티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좌고가 45센티가 되었다면, 장의 면적은 좌고의 2승이니까 2,025평방 센티미터가 된다. 따라서 젖의 적량은 2,025를 2로 나눈 1,012.5그램이 되는 것이다. 즉 1킬로그램 조금 더 이 양만 먹이고 있으면 아무 과부족 없이 소화되는 것이다. 3주간에 정상선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속을 썩인 것은 시중들기 위해서 와 있는 여의사였다.
“나는 동대의 모교수의 대리요, 모교수는 궁내성 대신의 명령이요. 궁내성 대신은 천황 폐하의 어명이요. 그러므로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을 감독합니다.”
이렇게 나오는데는 니시도 상당히 곤란을 단한 것 같다.
“전하, 저 여의를 다른 방에 가두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래, 좋아. 곧 그렇게 하지.”
이렇게 하여 일체 군말을 못하게 연금했다. 3주간 동안 니시가 맡아서 지도하여 3주째에 정상으로 성장시켜 돌려 주었다. 그런데 동대의 교수가 달려 와서, “왜 하나도 보고를 않느냐.”
“나는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니시 때문에…”
“무엇 니시가 너를 연금해? 그것은 불법 행위다. 그런 것을 왜 빨리 연락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그렇다 하고, 도대체 살아 있느냐?”
“잘 모릅니다.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 여의와 함께 들어와 본 결과, 왕자께서는 완전히 회복되어 살이 통통하게 쪄서 벙실벙실 놀고 있는데 놀라버렸다.
이것은 영친왕가의 유아(育兒)에 대한 니시의 승리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후 비천하께서는 2번이나 수태를 했는데도 유산을 했다는 것이다. 니시는 그것은 정치적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벌써 수십년전의 일이므로 발표해도 괜찮지 않겠느냐, 살인을 해도 10년간(?)을 숨어 지내면 일체 무죄방면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지만, 일찍이 영친왕께서는 우쓰노미야의 사단장을 하고 계실 때, 목이 잠겨 발성을 못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일왕의 앞에서 구령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결국은 니시가 우쓰노미야까지 불려간 일이 있었다. 그 때 니시가 어떻게 했는가 하면, 먼저 전하(英親王)를 의자에 걸터 앉게 하고, 손을 위로 올리고 흔들기(振動)를 1분 15초,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리기를 1분간, 그리고 또 손과 팔을 1분 1분 15초 위로 올리고 흔들게 지도했다. 그 사이에 발도 올리고 흔들도록 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발의 근육이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성대가 파괴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뇌와 성대의 글로뮈가 녹아서 없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11번을, 손을 위로 올리고 흔들게 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인후(咽喉)에는 찜질을 하고, 모관운동을 마치고 나서, 레몬과 귤의 짠즙에 꿀을 조금 떨어뜨려서 조금만 마시게 했다.
“전하 마당에 나가서 구령을 불러 보십시오.”
그래서 구령을 불러 본 결과,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소리가 툭 터져 나왔던 것이다.
“과연 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대저 이것은 무슨 요법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분무요법(噴霧療法)이라고 합니다.”
“분무요법이라? 대체 그런 요법은 의사가 고안한 것인가.”
“이것은 제가 생각해 낸 것입니다.”
“어째서 분무라는 말을 쓰게 되었는가.”
“그렇습니다. 분무기(噴霧器)의 원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니시는 여급에게 분무기를 가져 오게 하여 설명을 드렸다.
“분무기를 불면, 물속에 꽂혀 있는 관(管)속이 진공이 되어서 밑으로부터 물을 빨아올려 가지고, 그것이 안개처럼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과시, 분무기라는 것은 그런 원리로 되어 있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여 손과 팔을 함께 머리 위로 높이 올려서 흔들고 있으면, 손과 팔의 정맥의 혈액이 아래로 내려 가서 진공(眞空)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때에 인후를 아프게 하던 주변의 정맥혈도 함께 우심방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1분 15초라고 하는 것은 심장의 전체가 비(空)는 시간입니다.
손을 내리시면 혈액이 스며듭니다. 그 시간은 1분간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1분이 지나게 되면 또 위로 올려서 우심방에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분무요법이라.”
나중에 그 때의 사례라고 하여, 우쓰노미야의 양갱(羊羹―요깡)을 3백개나 보내 주셨다고 한다. 영친왕께서는 이 양갱을 잡수시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양갱만 자시고 계시면 인후의 글로뮈가 녹아서 목소리가 잠겨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니시는 이 양갱을 거의 다 이웃에 나누어 주었는데, 3백개라는 숫자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고 당시의 일들을 술회하고 있었다.(배성권)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7:20 2005년 09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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