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커뮤니티 > 건강매거진

건강매거진

8월2면-청암선생의 회고록(체험담)

  • 자연건강
  • 2009-12-20 14:46:20
  • hit689
  • vote0
  • 118.223.45.178
청암 김흥국 선생의 회고

문 경 동



저는 자연건강 1급 지도사 74호입니다. 1982년도 4월 3일~6일(4일간)에 제가 부산에서 제4차 때 지도사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올해 나이 76세입니다. 제가 나이 40세였을 때 몸이 아파서 병원을 내 집처럼 다녀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질병과 위궤양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난치병에 시달려 몸이 마를 대로 말랐으며 설상가상으로 암 진단까지 받게 되어 병원에서 시키는대로 치료를 받고 약을 밥보다 많이 먹었지만 몸의 상태는 점점 나빠 갈 뿐이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헤매던 그 무렵에 직장 선배의 주선으로 청암 김흥국 선생님을 뵈옵고 서식건강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난생 처음으로 서식건강 독본을 읽었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알고 있으며 부처님 다음으로 니시가쯔죠 선생의 자연의학이 진실되고 참다운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철학이며 종교이며 의술임을 깨달았습니다. 소식과 캬베쯔 요법, 감잎차와 생청수 먹기, 그리고 보건요양 6대법칙을 생활화 하고, 냉온욕과 나체요법(뒤에 풍욕법이라고 하면서 테이프는 청암께서 만든 것을 제가 단식할 때 최초로 사용하였습니다) 을 실행하였는데 날로 좋아지는 느낌이 오고 또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뒤 청암선생께서 저에게 일러 주시기를 병은 피의 혼탁이며, 자세의 불안정에서 오는 것으로, 그의 원인은 숙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하였으며 매료되어 단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처음 하는 단식이니 혼자 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의 자택(부산시 문현동)에서 함께 하자고 하시었습니다.
처음에는 3일간의 단식을 계획하고 시작하였으나 저를 위해서 함께 단식하시는 선생님의 열의와 자상한 지도, 격려에 힘입어 본 단식 7일을 마쳤습니다. 그때 대형 건강기가 지금은 산청분회에 비치되어 있는데 감회가 깊습니다. 단식 후의 회복식을 마치는 날 저더러 단식 기간 중 저의 일과생활을 보시고는 “원만히 수행을 마쳤다. 이제는 나의 제자로 받아준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선생께서 그 뒤 부산의 송정에 단식원을 개설하셨을 때, 저는 두 번째 단식을 실시하였고 두 차례의 단식 후에는 매일 냉온욕을 하였으며, 2년 전부터는 이틀에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5년 전부터는 아침도 먹지 않고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오늘까지 약을 먹을 일도 없고 병원에 간 일은 병문안을 위하여 갔을 따름입니다.
저는 자연건강을 접하게 되어 병마를 물리치고 건강을 되찾은 사람으로 김흥국 선생께서는 항상 겸손하시고 남의 말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귀를 기울이며 남을 도와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여 자연의학으로 복귀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지금까지 본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활할 것임을 오늘 추모회준비위원의 한 사람으로서(사회자) 청암 김흥국 선생님 영전에 굳게 다짐합니다.
저의 또다른 자연건강의 체험은 건강이 회복된 후 업무상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많았는데 어느 하루는 술에 취해 넘어진 후에 수족을 쓸 수 없게 되어 병원에 실려가 뇌진탕이라 하여 바로 수술을 하였습니다. 마취에서 깨어 병실에 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를 에워싸고 질문하기를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얼마냐 하여 쉬운 문제여서 둘이라고 답하였고, 열에 하나를 더하면 얼마냐고 하는 질문에 11이라고 답하였더니 100에서 50을 빼면 얼마인가 하므로 또 의사는 이제는 안심해도 좋다고 하면서 약을 주었는데 그 약이 어이없게도 간질병 약이었습니다.
수술 후에 병원에 문병을 오신 선생께서 저에게 좌우요진을 늘 하라고 권하시고 간질약은 먹지 말라고 하시기에 화장실에 가서 약은 버리고 링거 주사 바늘을 꽂은 채 좌우요진을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수술을 일요일에 하였으나 6일 후인 토요일에는 좌우요진의 효과가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퇴원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병원측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회복이 빠른 것은 인정하지만, 뇌 수술을 한 사람이니 3개월은 입원 치료를 하여야 하니 퇴원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치의를 만나 상담을 하면서 보게 된 사진에는 엉킨 피의 일부분만 수술하였고 차후 다시 수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를 생각하여 퇴원을 허락할 수 없으나, 꼭 퇴원을 하겠다면 말릴 방법이 없으니 만약에 퇴원 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병원측에는 책임이 없다는 본인의 각서와 가족들의 보증까지 받은 후에 퇴원 수속을 하였습니다.
퇴원 후에도 좌우요진을 계속하고 자연건강법을 따라 생활하였는데 며느리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졸라 마지 못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는 재수술을 하여야 한다던 핏덩이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확인하자 저도 놀랐지만 이 자리에서 좌우요진(등배운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저의 어머님이 78세 때 몸이 불편하시어 물조차 넘기지 못하시어 병원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기에 병명을 물었더니 병명을 알기 위하여 수술을 하여야 한다는 어이없는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와 크게 싸우고 강제 퇴원을 하여 중앙동 모병원에 입원하였더니 담석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수술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수술만하면 완치가 되느냐고 하였더니 의사는 결과는 해보아야 알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사의 답을 듣고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던 바, 약명을 적어주어 국제시장 약국에서 약을 구하여 드렸으나 오히려 사경을 헤매시게 되셨습니다.
병원에서는 우리로서는 고칠 방법이 없으니 임종을 맞으시게 퇴원을 하라고 하였을 때 청암 선생님께서 오셔서 체모관측을 하신 후에 장이 꼬인 것이니 생수에 마그밀을 타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자주 마시게 하고 붕어운동을 하시게 하라는 말씀이 계셨기에 구급차로 집에 모시고 오면서 차안에서 제가 마그밀액을 기구로써 경구 투여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형제들에게는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하나 어머님을 그냥 보내실 수가 없으니 자연건강법으로 내가 치료하여야 겠다고하였을 때 형제들의 반대는 없었습니다.
청암 선생님의 지도로 저는 조수가 되어 시키시는 대로 누워계신 어머님의 몸을 흔들어 붕어운동을 실시하여 마그밀수를 드시게 하고 관장을 하였습니다. 자연요법으로 치료를 시작한지 일주일 후 아랫도리에 피가 터져 나왔는지 온 방이 핏빛인데 피가 아니었고 숙변이 터져 나온 설사였습니다. 이후 건강이 회복되어 치매나 다른 아픈 곳 없이 94세에 자연사 하시었습니다.
자연건강과 김흥국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천추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겼을 것입니다. 김흥국 선생님께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아니고 생장노사(生長老死)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물건은 쓰다가 오래되면 망가져서 없어질 뿐(成住壞空 : 성주괴공) 병이 없는데 태어나서 잘 살다가 늙으면 가는 것이지 사람에게 병이란 글자가 붙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김흥국 선생님에 대하여 많은 일화(逸話)와 추억담이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말씀올리겠으며 머리 숙여 청암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자연건강 1급지도사)



청암 김흥국
형을 그리며

배 성 권


청암 김흥국 형!
청암 형께서 가신지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너무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은 부산에서 청암형을 추모하는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아침부터 기차를 탔습니다.
태평양 넘나드는 무지개 항로, 부산에 대해서는 저에게도 연유가 깊은 곳입니다. 부산 피난 시절에 한 때는 대청동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영주동 비탈길에서 내려오면 국제시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이었지요. 당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힛트를 치던 때였지요.
그러다가 초량동, 서대신동으로 주거를 옮겼던 일, 보수동 언덕바지에 수많은 바라크집이 바닷바람에 떨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대청동 길목에서 올라오는 길이면 국제서림, 서울서점, 녹화사, 당곡서림 등 전쟁통에도 수많은 서점들이 즐비해 있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산은 서식건강법, 서의학(Nishi Medicine)의 여명기에 횃불을 든 선각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특히 우리건강법의 선도자였던 청암 김흥국 형의 깊은 우정어린 땅이라는 데서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됩니다.
청암 김흥국 형께서는 한국자연건강회의 초창기에 참여하시어, 그 기초를 튼튼히 하시고 건강법의 보급 실천에서 뿐아니라 병고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위하고 또 새로운 지식을 입수하기 위하여 외국에도 자주 나가시었고 자연요법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고오다나 와타나베 박사들과도 친교를 돈독히 하여 우정의 탑을 쌓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동지 규합에 앞장서고 마음이 상하거나 불편한 점이 있어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이끌어 오신 우리 자연건강회의 거목이셨습니다.
또 별칭 우리건강회의 삼바가라스라고 불리는 청암, 요석, 필자, 세 사람이 노변에 걸터앉아 박주를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고 또 사명감에 불타는 열변을 토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청암, 요석 두 분이 차례로 이승을 달리했습니다. 서거하시기 전에는 경기 화서에 이주하시어, 저와 헤어지는 분기점인 금정역에서 내리어 박주를 기울이며 끝내 헤어지기를 섭섭해 하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청암 형 생각이 나서 그 주점에 들렸더니 여주인이 “왜 오늘은 혼자 오셨느냐”고 했습니다. 그동안 가게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만도 대견했는데 아직도 청암 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안주없이 한병만 먹고 가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그 여주인 왈 그럼요, 다음에 두 분이 같이 오세요. 하는 말을 등뒤로 가게문을 나섰습니다.
병원에서 가료하시다가 자택으로 옮기신 후에는 비교적 자주 가뵈었는데 그럴때마다 로또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자 행운을 받으십시요” 하니, 곁에 계시던 사모님께서 그러다가 소송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웃으니, 청암 형께서도 싱긋이 웃으시면서 “소송 걸릴때 걸리더라도 한번 당첨이 돼서 건강회관 건립에 일조가 됐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작년 세말에 고다박사를 방문했을 때 “김흥국 선생이 먼저 가고 나니 마음이 너무 허전하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유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하나의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인 생은 누구나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부디 청암 형께서는 중생들의 구원의 손길로 임하시어 저 세상에서도 밝은 등불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중에서도 가장 큰 보시가 법보시라고 했습니다. 지난번 본회를 방문하신 유족대표께서 뜻을 같이 하여 청암 김흥국 형의 소책자 “소식이 세계를 구한다”를 5,000부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청암형의 남긴 뜻을 받들어 모든 분들에게 무가로 이것을 배포하려 합니다.
청암형!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청암형의 안식을 삼가 기원합니다.

요석 한학륜 형의 영전에

요석 한학륜 형! 우리가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자연건강회 초창기에 저를 전화로 불러내어 서로 만나게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는 매월 어김없이 월례회를 가졌는데 집회 장소를 구해서 동분서주하던 일, 주로 당시 효재동 서울대학교 맞은 편에 있던 가톨릭 교육회관 강의실을 빌려 썼던 일, 월례회 안내 포스터를 그려서 회관 입구에 둘이서 마주 잡고 붙이던 일 등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당시 요석 형께서는 몸이 불편하여 현대의학에 의존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여러가지 민간요법 같은 것을 해보았지만 역시 효과를 못보다가 다행히 자연건강법의 전신인 서의학(Nishi Medicine), 서식(西式) 건강법을 실행하여 쾌차하게 되자 오로지 자연건강법 보급의 일념으로 혼신의 힘을 쏟으셧습니다.
요석형! 형께서는 이 유일무이한 자연건강법을 보급하여 만인에게 혜택을 돌리기 위하여 자연건강법의 창안자인 니시(西勝造 : Nishi Katsuzo) 교수의 저서들을 번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바로 「니시의학 건강원리 실천보전」이 그것이었습니다. 동지애의 고리를 만들어 결속하기 위하여 공역으로 소생과 둘이서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저는 재일교육센터 원장으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나머지 모든 일은 형이 완성하여 만들어 오늘날까지 교본으로 쓰고 있습니다.
소생이 도일하면서 배은성옹이 2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요석형은 당시 총무직을 스스로 자청하여 많은 업적을 쌓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9년 1월 7일에는 최초로 우리 건강회에서 지도사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도 요석형의 절대적인 힘이 컸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터입니다. 또 경기 동산면에 민박을 빌려 한천단식을 처음으로 전수 체험한 것도 그때 무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말씀드리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석형이 주관이 되어 「현대병의 도전」을 공역 간행하기로 하고 청암, 정산, 요석, 소생 등이 번역하여 원고를 드렸는데 그 뒤에 아무 소식이 없이 잠적해 버린 것은 무슨 까닭이였던가요. 궁금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석형은 수많은 자료, 니시교수의 저서를 우리 말로 옮기는데 심혈을 기울이셨고, 그 중에는 원저가 출간되지 않고 기관지에만 연재되었던 것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도 한 두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석형께서는 우리 자연건강계의 국보적인 존재요 최고의 공로자라고 할 것입니다.
요석형께서는 명동에 있는 계성여자중고등학교 교사, 교감을 오래 하셨는데, 그때마다 소생과 만나기 위해서는 북창동 남대문 시장, 서울시청앞 부근의 작은 음식점에서 탁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토씨탕을 안내하여 소생이 처음으로 맛보게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는 서울역 부근의 유랑마차에서 시작해서 숭례문을 거쳐 청계천으로 행군하여 흥인문에 다다르는 대장정을 한 일도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 뒤 청암과 합류하면 청탁과 장소를 불문하고 합류하여 화제의 꽃을 피우던 일도 생각나실 것입니다. 우리 셋은 이른바 삼바가라스라고 할 정도로 늘 함께 했는데, 이제 청암형도 가시고 요석형마저 가시니 사방천지 육합이 텅 빈 것만 같습니다.
또한 우리 건강회의 생명줄이요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회보 「자연건강」을 보면 요석형의 피땀어린 노고가 선혈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상 요석형과의 인연을 무엇으로 더 말씀드리겠습니까.
1993년에는 본회의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에 비추어 선명하고 확실한 자연건강법을 보급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독립하여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서식건강동호인 백수회’를 만들어 매월 회보 「덕업상권」을 편집 간행하여, 1993년 8월호부터 2000년 5월호까지 통권 94호를 낸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과로가 되어 요석형의 건강을 흔들어 놓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그후 우리들은 요석형의 업적과 노고를 생각하여 명예회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이제는 그 영예를 영원히 간직하기기 바랍니다.
요석 형께서 병상에 누우신지 수년 동안 그때마다 찾아가 용태를 보면, 그래도 약주 한잔을 즐기시고, 백세주보다는 소주 한잔을 달라하시던 그 저력과 생명력! 그러나 마침내 운명을 며칠 앞두고는 안타깝게도 약주도 금하시고 기억력도 쇠잔해 가는 그런 모습을 면면히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낮에도 커튼을 드리운 채 쇠약한 몸으로 딱딱한 평상과 경침을 베고 투병을 하시던 모습은 성인, 성자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요석형!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내생에는 부디 부자집에 태어나시고, 다시 한국에 태어나시어, 이 생에서 펴지 못한 건강법 반포의 못다한 꿈을 다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석 한학륜 형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배 성 권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7:05 2005년 08월호에서 이동 됨]
게시글 공유 URL복사
댓글[0]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