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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4월-잘먹고 잘 사는길

  • 자연건강
  • 2009-12-20 14: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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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사는 길

전 재 근

내식성 찾아보기
식성이 이렇게 은밀히 전해진 것 만큼이나 그 실체를 알기가 쉽지 않다. 실체를 아는 데는 관찰이 큰 무기이다. 사실 과학도 끝없는 관찰을 통해 이룩한 것이다. 관찰을 한다 해도, 첫째의 난관은 ‘식성을 무엇으로 어떻게 관찰을 하나’이다.
내 식성은 나밖에 더 잘 아는 이가 없으니 내가 나를 관찰할 수박에 없다는 말이다. 관찰은 가장 가까이에서 하는 밀착 관찰이 제일인데, 내가 나를 밀착 관찰한다면 보는 놈과 보일 놈이 붙어 있으니, ‘내 눈으로 내 눈을 본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형상으로 형상을 관찰하는 그런 관찰로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옆집에서 청국장찌개를 끓이는 모양이다. 나는 문득 먹고 싶은 생각이 보글보글 일어난다. 된장은 옆집에서 끓이는데 먹고 싶은 생각은 내 속에서 일어난다. 나는 벌렁거리는 코를 매만지며 내 식성을 본다. 슬며시 살피니 식성이 발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너, 이 놈 꼼짝 말고 게 섰거라.’ 소리쳐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다시 자문자답해 본다.
‘이 식성을 그 전에는 왜 못 보았을까?’
‘어려서는 먹고 놀기 바빠서 못 보았고, 학생 때는 세상 바깥일을 이것 저것 주워 배우느라고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다. 청춘 땐 사랑의 꿀맛에 빠져 보이지 않았고, 부모가 되고는 자식들에 매어 뒷전에 밀쳐두었다.’
‘식품학자가 되고는 먹거리만 찾다가 먹는 나를 그만 잊어버렸다.’
‘이제 어느 새 늙어 백발이 성성한데 식성을 못 보았다면 부모로부터 받은 식성으로 일생동안 잘 사용하고도 제대로 인사 한번 못하고 갈 뻔 했지 않은가.’
‘뒤늦게나마 그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식성에 머리 숙여 절한다.’
육신이 다해도 다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식성의 맥, 그 놈과 짝하여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못 보면 남이고 보면 나다. 맛은 식성이 있어 비로소 있는 것이니 식성을 찾아야 진정한 맛의 뿌리를 알 수 있다.

식도(食道)
도(道)라는 말은 어떤 경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법, 깊이, 정신, 진실, 마음 등을 연상시킨다.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도를 붙여 ‘다도(茶道)’라 하는데, 하루에 세 끼씩 또박또박 먹고 사는데 왜 ‘식도(食道)’는 없는가? 나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답해 본다.
‘왜 없어, 있지. 첫째, 밥 넘어가는 길이 식도(食道) 아닌가! 그렇다면 귀로 소리를 들으니 그 길이 성도(聲道), 코로 냄새를 맡으니 취도(臭道), 눈으로 사물을 보니 상도(相道), 피부로 감촉을 느끼니 촉도(觸道)라 할 터인데 그런 말은 없고 어찌 식도(食道)만 있는가?’
어디 그 뿐인가. 음식을 즐기는 사람을 식도락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것에도 무슨무슨 도락가란 말을 써야 할 터인데 쓰지 않는다. 굳이 식도, 식도락을 드러내는 것은 식도(음식 넘어가는 길)가 워낙 커서 다른 길과는 비교가 안 되니 그런가 보다. 사람의 먹는 모습을 살펴보면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얌전히 먹는 사람, 게걸스레 먹는 사람, 복 붙게 먹는 사람, 복 떨어지게 먹는 사람, 병나게 먹는 사람, 죽지 못해 먹는 사람 등등.
또 먹는 데도 많은 길이 있다. 먹고 사는 길, 먹고 죽는 길, 먹고 건강해지는 길, 먹고 즐거운 길, 먹고 패가망신 당하는 길 등등.
이렇게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면 과연 올바로 먹는 길은 무엇인가?
먹으면서 먹는 행위의 신비를 체험하는 길, ‘이 먹거리가 어떻게 나에게 주어졌는가? 나는 과연 먹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는 길, 먹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는지 그 뿌리를 아는 길, 식욕의 뿌리를 찾아 스스로를 다스리는 길, 맛의 무상함을 깨달아 맛에 매이지 않는 길, 이것이 먹는 나의 주인공을 알아가는 길이다.
이만하면 식도란 이름을 붙일 만하지 않겠나? 진정한 식도는 내가 지금 먹는 마음이 아득한 전생의 나의 근본과 통하고 있어 도(道)라 하며 그 길을 통해서 참 자기와 만날 때 그것이 도통(道通)일 것이다.

스트레스와 음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원래 스트레스〔응력(應力), stress〕란 용어는 어떤 물체가 외부로부터 힘을 받으면 그 힘에 저항하려는 내부의 힘이다. 사람이 건너다니는 다리는 엄청난 힘을 받는다. 이때 다리는 응력을 내며 휘게 된다. 사람이 다닐 다리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응력의 한계를 초과하여 그만 부서지고 만다.
우리가 외부에서 압력을 받으면 우리는 그것에 대응하는 힘을 보이게 된다. 남으로부터 욕을 먹으면 화가 난다. 욕은 외부의 힘이고 화는 욕에 대응하여 저항하는 내부의 힘, 응력이다. 만약 욕이 지나치면 인내의 한계를 초월하여 사건이 터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은 스트레스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도한 스트레스는 소화에 장애를 줄 뿐만 아니라 만병의 근원이 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스트레스 푼다고 이것저것 다해 보는데 사실 하나를 풀면 다른 것이 생긴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태가 바로 스트레스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
마음을 평정한 상태로 되돌리려면 내부에서 견뎌내는 힘의 한계를 늘려야 한다. 자동차는 쇼크 압소바(shock absorber)라는 충격완화장치가 있어서 자갈길을 달려도 탕탕 튀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동차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바로 여기에서 음식이 톡톡히 한 몫을 한다. 나는 36년 넘게 강단에서 강의나 강연을 하지만 아직도 강의할 때는 잔뜩 긴장한다. 그래서 연단에는 언제나 물 한 컵이 놓인다. 또 강의가 끝나면 차 한 잔을 마신다.
회담은 상대의 시선과 귀에 얹힌 마음 화살을 받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해아 하니 자연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하는 상담장이나 회담장에는 늘 음료수가 탁자에 놓인다. 마시면 스트레스를 덜 받거나 풀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땐 내장이 일을 한다. 내장은 자율신경계가 지배하고 있는데, 보고 느끼는 감정을 지배하는 의식층보다 깊은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깊은 물 속은 파도가 일지 않듯이 인간의 깊은 마음에는 자잘한 생각을 흡수하는 기능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치기가 일어나지 않고 생각이 쉬워지니 긴장이 풀릴 수 밖에 없다.(서울대학교 식품공학 교수)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6:52 2005년 07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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