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4면-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랑
- 자연건강
- 2009-12-20 14: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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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L.N 톨스토이
나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문제를 취급한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처녀가 위해를 가한 자에게 복수하려고 그 사람의 아이를 훔쳐다가 마법사에게 보이며 어떻게 하면 이 아이에게 가장 잔인한 보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논했다.
그 아이는 원수의 외아들인 것이다. 그랬더니 그 마법사는 그가 지정하는 곳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을 명하고,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복수를 하는 길이라고 납득시킨다. 그녀는 마법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지켜 보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 아이를 후손이 없는 부호가 주워가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깜짝 놀라서 마법사에게 크게 책망한다. 그랬더니 마법사는 잠깐만 참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는 사치와 게으름 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법사는 또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마침내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 가서는 그녀가 복수욕의 충족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가엾어져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부자집의 게으름뱅이가 되고 방탕자가 되어 선천적으로 잘 타고 난 좋은 인간적 성품을 형편없이 망쳐버린다. 이렇게 해서 그 아이는 마침내 육체의 질병, 빈곤, 참괴(慙愧)의 사슬로 묶이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그녀는 이상하게 감상적이 되어서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도덕생활에 대한 동경(憧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사치와 게으름과 타락으로 길들여진 신체의 약점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무익한 고투(苦鬪)가 계속된다. 점점 영락(零落)한다. 술독에 빠진다. 그리고는 범죄와 발광(發狂) 혹은 자살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이다. 따라서 누구나 오늘날 부유층 계급의 아동교육을 보고 공포와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잔혹한 적만이 이들 결함과 해독을 아이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 이러한 병폐와 해독을 양친들 특히 어머니들이 지금 그들의 자녀에게 계속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초 이 게으른 습관은 그들의 자녀들이 도적적 의의를 아직 알기 전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제와 자제의 습관이 잊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식 교육의 실천과 일반적으로 고대의 그것과 상반해서 이 품성이 완전히 거세되어 버리고 조금도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일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든가 많은 노동에 필요한 제덕(諸德), 예를 들어 마음의 집중,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정신, 인내력, 일에 대한 열중, 훼손된 것에 대한 수복능력, 피로에 대한 통효(通曉), 성공의 희열 같은 것에 대해 업신여기도록 훈육되어 있다. 즉 훼손한 물건, 던져버린 물건 등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않고, 또 마음에 드는 것은 언제든지 돈으로 다시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모든 타인의 진달(進達)에 불가결한 이성의 최초의 덕을 획득하는 힘을 박탈당하고, 사람들이 정의의 숭고한 제덕이나 인간에 대한 봉사,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며 찬미하는 세상에 방치해 버리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박약하고 둔감한 청년의 성질은 교육으로 주입된 선과 진정한 참 선과의 사이에 차별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디에나 당연한 것으로 되어 이는 상호적 만착(瞞着 : 남의 눈을 속임)으로 만족하고 있는 성질로서, 그것을 부여받으며 자기 기만(欺瞞)의 호인처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만사형통처럼 보이지만, 이 부류의 인간은 죽을 때까지 깨치지 못한 도덕의식을 지닌 채, 평온무사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생활의 부도덕한 연유로 의식이 대기에 가득 차서 천부(天賦)의 심장을 꿰뚫을 때 항상 괜찮다로는 끝나지 않는다. 특히 그것은 만년에 가서 일어난다. 자주 아니 더욱 빈번하게 진실하고 적나라한 도덕에 대한 욕구가 눈을 뜨는 일이 있다.
그러면 실로 통렬한 내부적 갈등과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극히 드물게는 도덕적 정조의 승리로 종결된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람이 그 생애가 좋지 않다고 느낀 나머지, 그 근저에서부터 그것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 때 사방에서 같은 투쟁을 해내려고 했다가 패배한 사람들로부터 습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선덕은 결코 자제나 극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며 개혁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주입하려고 한다. 혹은 또 포식하거나 장신구로 몸을 꾸미고 치장해서 육체적 게으름을 탐하게 하며, 인간의 구실을 단단히 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밀통까지도 할 수 있다는 잔혹한 유혹을 자행하면서 선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이 내부적 쟁투는 슬픈 종말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역시 애써 결심하고 뜻을 세웠던 사람도 그 약점에 의해서 애석하게 정복당하고 일반의 여론에 휘감겨 양심의 소리를 억눌러서 들리지 않게 하며, 자기 스스로를 상찬(賞讚)하여 그 이성을 비뚤어지게 왜곡시키고, 이렇게 하여 그것들과의 도락생애(道樂生涯)를 계속하면서 자기만은 속죄받는다든가 새크러멘트(Sacrament, 세레, 성전)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5:55 2005년 03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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