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4면-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 자연건강
- 2009-12-20 14: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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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L.N 톨스토이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행위는 악이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그를 위해서 일하도록 강요하고 착취하는 한 그는 항상 불안정한 지위에 있다. 만약 그들이 그 많은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습관이 되어서 그 많은 악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 버린 단계가 되면, 한편 그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증오와 질시를 품고 일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될 기회를 노리게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항상 만족을 모르는 욕구를 창출해 내어 끈질기게 뿌리박혀 있는 구습과 더불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위험 속에 있게 된다. 또 저들 정의파의 견지에서 보면, 그런 행위는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노력을 제공하는 그 노동자에게는 백분의 일의 쾌락도 주지 않고 이것을 사역(使役)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의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타인을 사랑하는(利他) 사람은 그들의 노력의 열매를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취하기보다는 도리어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논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리(功利), 이 정의(正義), 이 사랑(慈悲)의 요구는 우리의 근대사회에 의해서 거의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제욕(諸慾)을 한정하는 노력의 첫째의 덕(第一德)이라는 것도 혹은 최후의 덕이라는 것조차 생각지 않고, 도리어 선한 생애를 보내기에는 거의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로 오늘날 인생에 대한 유행적이고 가장 광범위하게 펼쳐 있는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람의 욕망 증대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예를 들면 발달진보, 개화문명 및 완성의 징조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교육을 받은 지식계급은 안락의 습관, 결국에는 게으름뱅이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도 불구하고 무해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도덕적인 상품(上品), 즉 하나의 덕목을 구성하는 고상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욕망이 더 많아지고 그 욕망들이 더욱 정련(精鍊)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데는 최근 2세기 동안의 서사시 특히 소설보다 이것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묘사된 덕의 이상을 나타내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어떤가? 많은 경우 무엇인가 고상하고 탁월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차일드 해롤드 이래 휘이레 토로로프 혹은 모파상의 최근의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다만 탁월한 게으름뱅이들 뿐으로서 그들은 모두가 얼마나 많은 인간의 노동을 사치를 위해서 착취하고 많은 돈을 탕진해 버리고 그대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아무 유익한 일도 하지 않는 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 여주인공은 어느 정도 이들에게 이것저것 다소의 희열(喜悅)을 주는 정부(情婦)인데, 게으르고 타락한 점은 그들과 똑같으며 그들의 또 사치를 위해서 노동력을 소비하는 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절제(節制)하는 실업가들을 문학작품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묘사(描寫)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군중에 대한 이상으로서 소용될 수 있는 일반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을 말하려고 한다. 즉 대다수의 남녀가 비슷비슷하게 되어 있는 그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내가 소설을 쓰고 있을 때 경험한 어려움이 있었다(당시 나는 쓰지 못했다). 나는 그 어려움(困難)과 싸웠다. 그리고 참 도덕적 미를 구성하는 관념이 몽롱해 있는 소설가는 모두 이것과 싸우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상적으로 선량하고 친절하며 동시에 인생에 충실한 묘사로서 훌륭한 인물을 상류계급에서 가져다가 묘사하는 어려움이다. 인생에 충실하기 위한 상류 유식계급의 남녀 묘사는 그 일상의 경우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래서 그 삶의 모습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육체적으로 게으르고 타락해 있으며 게다가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다는 탐욕의 생활이다.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이 사람들은 반대해야 할 사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여실하게 유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숨김없이 묘사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소설가들은 그것을 시도한다. 실은 나도 그것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묘한 변명인지 모르지만 아주 무익한 태타(怠惰)의 경향을 가진 유행하는 방조자격의 부도덕한 사통자(私通者)를 살인자, 결투자 혹은 군인으로 만들어(설정) 등장시켰다. 그런데 그것 자신이 유인적이기 때문에 그 다음은 이미 예술도 노력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선 이런 묘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소설의 독자는 어떤가. 대체로 그런 부류의 인간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잃으면 바로 이들 차일드 해롤드, 오네깅 뮈슈, 드 까몰 일당이 최고의 우수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주〕 오네깅은 푸쉬킨의 시 속의 주인공. 그 다음은 휘이레의 소설 속의 주인공)
현대인이 이교의 자제와 기독교의 극기를 선 혹은 바람직한 품성이라고 실제로 인정하지 않고, 반대로 욕망의 증대를 기준으로 해서 선 혹은 고상한 품성이라고 생각하는 시초의 증거가 현대사회의 대다수 아동이 받는 교육 속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다만 이교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같은 자제가 순치(馴致)되지 않고, 기독교의 특유한 극기에 대한 훈련이 없을 뿐 아니라 앞의 예와 같이 게으름뱅이나 육체적 태타나 사치의 습관을 서서히 심어주는 것이다.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5:11 2005년 01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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