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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면-생식요법 연구

  • 자연건강
  • 2009-12-19 16: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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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요법 연구

생채식과 건강

생채식연구회

포만가(飽滿價 : 만복감)가 높다
생야채는 섬유가 많고 용량이 크며, 더욱이 그것을 먹는데는 충분히 씹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칼로리량의 섭취로도 포만감을 가질 수가 있다.
장의 활동을 고무한다
식물성 섬유가 많기 때문에 장을 자극해서 그 운동을 항진한다. 따라서 생식을 조금만 계속해서 실행하면, 상습 변비자라도 체액은 중화되고 변통이 잘되는 것이다. 또 생식을 하면 장내의 세균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이것은 단백질의 부패가 감소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세포가 새롭게 된다
생식을 하면 젊어진다고(回春) 흔히들 말하지만, 이것은 생식을 하면, 세포가 일신되어 살색도 생생하게 보이며 역시 젊어진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다. 최근 젊어지는 미용식으로서 생식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뮈를 부활, 보수, 강화해서 증감을 조절한다
글로뮈는 미세한 동정맥의 집합체이며 분화한 동정맥의 문합이며 맥관(脈管)과 신경과 근이다.
생식은 풍부한 음식물, 운동부족,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의 생활혁명
글로뮈는 생후 얼마되지 않아서 수없이 형성되어 10대, 20대로 상승하여 40대 정도부터 서서히 감소하고, 노쇠와 함께 위축하거나 경화하거나, 또 소멸하거나 한다.
그러므로 이 글로뮈가 위축하거나, 경화하거나, 감소한다는 것은 생리적 작용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여 혈액의 순환, 모세관의 작용을 둔하게 하고, 피하출혈까지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 생식은 이 폐해에서 부활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생식요법의 효능
서식의 순생식(생식요법)을 6대법칙과 병용하면, 거의 모든 병이 완쾌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현대의학으로서도 치료가 되지 않는 난치병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반드시 실행해야 할 방법인 것이다.
생식은 처음 1주간은 맛이 없지만 제2주간부터는 이럭저럭 먹을 수 있게 된다. 제3주부터는 아주 맛이 있게 되며, 자연의 미각을 되찾아 어째서 더 일찍이 생식을 안했던가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생식요법의 효능을 병에 따라서 구체적 동기를 들면,
전신으로 응용하는 경우
젊어지는 회춘법, 체질개선, 체액의 정화, 세포의 생생, 글로뮈의 재생과 조절, 모세작용의 촉진.
주로 탈수작용에 응용하는 경우
신질환, 심장성부종, 간장성 및 기타 부종, 복수저유, 고혈압과 동맥경화, 뇌일혈, 중풍, 다즙증, 요붕증, 지방고다증 등.
주로 소화작용에 응용하는 경우
화농균의 염증 피부의 염증, 결핵성질환, 관절류머티즈, 통풍 및 이것에 의한 신경통, 설사, 숙변배제, 만성변비증, 만성위장카타르, 위궤양, 호흡기질환, 열성병, 천식 등.
기타의 경우
당뇨병, 신경질환, 안질환, 편두통, 치질환, 간질, 안산, 자간 예방.
이상과 같이 생식이 모든 난치병에 효능이 있다는 것이 실증되는 것이나, 어느 편이든지 생식은 피마자 기름을 먹는 고통이나 쓰디쓴 약 등을 먹는 고통과는 달라서 익숙해지기에 따라서는 맛있게도 되고, 용이하게 누구에게도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현재 난치병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되도록 빨리 실행에 옮겨주기를 바란다.

생채식을 하면서 운동을 권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NISHI의학」 VOL17. NO7)-

고오다 박사 지도

아토피의
건강합숙 체험기
건강한자녀양육연구회

프롤로그
아토피성 피부염 발증(發症)의 메카니즘은 상당히 해명되어 왔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좀처럼 근본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토피의 증상을 「질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 방식을 고쳐서 자연치유력을 중시하는 치료를 함으로써 아토피는 고칠 수가 있다.
-의학박사 고오다 미쓰오-

첫 번째의 입원
그러는 사이에 몸의 컨디션도 안정되었고, 마음 가짐도 변하였고, 지금은 몸의 기초공사를 하고 있어 호전반응이 일어나고 있다고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정도의 냉정한 눈으로 병을 가지고 있는 자신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매일 생활에 쫓기고 있던 나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만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지금은 몸 하나만 생각하라.” 하고 말씀해 주신 말씀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갈등과 많은 의미가 있는 2개월의 기간이 지나갔다.
퇴원 후
입원 생활은 끝나고 바로 대학 생활로 들어갔다. 겨울의 후지산은 추위가 무척 심하여 체중이 8kg이나 감소한 나에게는 한층 심하게 느껴졌다. 눈 내리는 날 벌거벗고 체조를 하였으며, 정전이 된 적도 있었다. 수업 중에 기분이 나빠져서 양호실에 간 적도 여러번 있었다. 공예과에서 하였으므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도 많았고 하나의 작품을 손질하는 데는 정신력도 필요했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도 체력과 집중력이 없어 그것이 괴로운 고민이기도 하였다. 최초에는 이렇게 180도 바뀐 생활에 어리둥절 망설인 적도 있었지만 가족들과 대학의 친구들이 나를 도와 주었다.
퇴원 후에 바뀐 것을 말하자면 푸른 채소즙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과 현미밥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피로가 쌓이지 않게 한다든가, 피부관리에 신경을 쓰는 등 몸에 신경을 쓰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심한 탈선도 몇 번 있었다. 식욕의 유혹을 뿌치칠 수 없어서 지금까지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가장 먹고 싶었다.
배가 불러도 맛이 없어도 계속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마음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퇴원하여 자유로워진 대신 식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치 식욕의 노예 같았다. 그 뒤 식욕이 정상이 되기까지는 몇 개월이 걸렸다.
두 번째의 입원
두 번째의 입원은 대학을 졸업한 해의 여름이었다. 4월부터는 집에서 몸을 제일로 생각하고 생활했으므로 아토피가 심하게 나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위 주위가 묵직하고 나른함을 느꼈으므로 현상 유지에 그쳤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과식을 해도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그럴 때 두 번째로 입원하도록 권고를 받았다. 나에게 찾아온 두 번째의 기회였다. 고오다 선생님은 이런 칠칠치 못한 저에게 도움의 손길을 잡아 주셨다.

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L.N 톨스토이
이와 같이 참 의미로서의 기독교를 마음 속에 품지 않고, 이단교로부터 재차 추락한 사람들은 극기(克己)와 별도의 것으로 신과 사람에 대해 사랑을 말하고, 자제(自制)를 빼어 버린 정의라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말한 것은 아랫 단계에 있는 제덕(諸德)을 빼버린 채 높은 단계의 제덕을 말한 것이다. 즉 이것은 제덕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고 그 유사물 즉 가짜의 모조품을 말했던 것이다.
혹자는 「자기를 버린다(棄己)」는 것이나 다른 덕성을 빼버린 채로 신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극기 없이 인도(人道)의 봉사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가르침과 같이 사람을 높은 도덕의 영역에까지 인도하는 척하고, 그 실은 도덕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로써 그를 방면(放免)하여, 그 수성(獸性)을 격려함으로써 신자나 비신자도 공히 그 가르침이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이와 같이 여기서 도덕의 근본적 요구라고 한 것은 훨씬 먼저 이교도에서 승인되었고 참 기독교에서 거부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강화되었던 것이다.)
지난 날 사회주의에 대한 법황의 교서(모드의 〔주〕에 이르기를 법황 레오나 3세가 발표한 회람장을 말한다)가 발표된 것을 보면 사유재산의 악에 대한 사회주의의 견해에 대하여 겉치레만 미끈하게 변박(辯駁)한 후에 그것이 노골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과 더불어 그의 일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물건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상 그 종래의 상태를 적당히 유지하는데 마땅히 필요로 하는 물질까지 나누어 주라고 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부적당하게 생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초과하는 물질은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의무로 해야 한다. 남은 잔여물(殘餘物)이야말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할 물질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광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의 장(長)이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기왕에 자력에 의한 구원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교회의 교사가 이렇게 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만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는 이기의 가르침과 어울어져 그들은 사랑을 설하고 또 감격으로써 사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보라의 유명한 말씀을 불러내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극기의 요구가 충만해 있다. 그 극기가 기독자의 완성에 도달하는 제1조건이라는 시현(示顯)이 넘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는 운운」이라든가, 「부모를 버리지 못하는 자는 운운」이라든가, 「생명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운운」 등의 확실한 언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버릇을 포기하지 않고 혹은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조차도 포기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 다만 교회뿐만 아니라 기독자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사람들(자유 사색가)도 이와 비슷한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고 또 글로 쓰거나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의 욕구를 조금도 감쇄(減殺)하는 일 없이, 또 그 쾌락을 억압하는 일 없이 그들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즉 선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덕을 완성하는데 이교도의 도행(道行)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로서의 기독자의 가르침도 소화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들은 기독자의 취해야 할 바 도행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지도자 없이 방치되었던 것이다.
그 옛날 기독자의 가르침이 없었던 시대에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인류의 스승들은 모두가 인생의 첫째덕(第一德)으로서 자제(自制)를 인정했다. 그리고 또 모든 덕은 그것을 가지고 시작하며 그 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즉 자제하지 않는 사람은 수많은 욕심(諸慾)을 한없이 일으키고, 그것에 완전히 맡겨 노예가 된 사람은 선한 생애를 살지 못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데 또 이런 것도 분명한 것이었다. 사람이 염결정의(廉潔正義)까지도 관대(寬大)함이나 지극한 사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그것을 말하기 전에 우선 그 자신이 자제(自制)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그런 것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제욕을 정점까에까지 발전시킨 자는 우리 사회에서 그 폭을 넓혀서 사람을 속박하는 무익한 많은 습관을 만족시키지 않고서 생활할 수 없는 인간을 그것으로써 또 도덕적인 선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낮게는 공리주의, 높게는 정의를 요구하는 이교주의, 더 높이는 사랑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어느 견지에서도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사용할 때는 그것은 통렬한 비난을 받아야 할 노동의 착취인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악한 행위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 쾌락도 끊으려고 하면 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초의 첫번째의 악(第一惡)을 범하지 않도록 먼저 그것을 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4:53 2004년 12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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