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5면-톨스토이의 채식주의사상
- 자연건강
- 2009-12-19 16: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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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L.N. 톨스토이
현대인들은 선한 생애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품성 덕능상의 순서에 관한 자각을 잃고 있다. 그 결과 선한 생애를 무엇이 조립하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관념을 잃고 있다. 결국에는 이와 같은 방법을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가 이교의 자리에 들어 왔을 때, 이교의 가르침에 수많은 뛰어난 도덕적 요구를 고조했다. 그리고 이것도 동시에(異敎의 道德의 경우도 그렇지만) 제덕(諸德)의 완성에 빼놓을 수 없는 순서를 필연적으로 정했던 것이다. 결국에 그것은 바른 생애에 도달하는 일을 필조(必條)라고 하는 보증에 관한 계급인 것이다.
플라토의 제덕은 자제에서 시작하여 용기와 지혜(智慧)를 거쳐서 정의에 이르고, 기독교는 자기를 버리는 데서 시작하여 헌신을 겨쳐서 신의 의지 즉 사랑에까지 오른다. 기독교를 진실하게 수용하고 바른 기독자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기독교를 터득한 것으로서 그들은 항상 그 제욕(諸慾)을 포기하는 것에 의해서 바르게 생활하는 것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욕의 포기 속에는 이단의 자제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에 관해서 기독교가 이교의 가르침과 이유도 없이 공명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로 하여금 기독교를 높은 곳에서 이교의 수평면에 떨어뜨린다는 힐책을 면하게 해주기 바란다. 이런 힐책은 생각컨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은 기독교는 세계 최고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본래부터 인정되고 있는 바, 이교와 전연 종류가 다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단교의 가르침 속에 파고 들은 것은 그저 단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도 종류를 다르게 하고 있고, 또한 여러가지로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쪽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가 사람들을 진리와 선을 향해서 지도하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그리고 항상 그것이 같은 만큼, 그것들에 도달하는 길도 또한 같다. 그래서 그 길의 첫걸음(第一步)이 기독교의 가르침에도 이단자의 가르침에도 피할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양자의 선에 관한 가르침의 다름(相違)은 실로 다음의 일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이의 가르침에서는 결국 인간이 완성되는 것으로서의 가르침이며, 기독교의 그것은 어디까지 가도 미완성의 것으로서의 가르침인 것이다.
어떤 이교,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가 아닌 어떤 교파의 가르침에서도 사람들의 앞에 모두 완성의 본(모범)을 놓는다. 그렇지만 기독자의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그들 앞에 놓은 것은 미완성의 본인 것이다. 예를 들면 플라토의 완성의 본으로서 정의를 놓지만 기독교의 본은 사랑의 미완성인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타 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는 각기 다른 도덕적 단계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전자에 의하면 최고의 제덕(諸德) 성취가 가능한 일이며, 거기에 도달한 한단 한단의 단계는 마침내 그 비교가 가능한 공덕을 가져 오고, 그것이 일단 높으면 공덕도 그만큼 크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타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을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부도덕의 정도도 논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미완성의 이상(理想)을 내세우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분류는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거기에는 도덕적 표준의 고저가 있을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을 무한의 저쪽(彼岸)에 내세우는 기독교는 걸음마다 단계마다 무한의 이상(理想)에 대한 관계는 같은 것이다.
타 종교의 신도 사이에서는 사람에 의해서 도달된 덕(德), 그 자체의 평면(平面)이 그 사람의 공덕을 구성한다. 기독교에서는 공덕의 구성은 저 최고의 이상에 도달하는 작업의 경과 중에 존재하며, 그 도달의 지속(늦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타 종교 신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異性)의 덕을 움켜잡은 사람은 그 덕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높으며, 여기에 더하여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더 한층 높게 평가되며 이 위에 정의(正義)를 더하는 인사는 도덕적으로 일단 높은 자리에 선다. 그렇지만 기독자는 저들보다도 이들을 높거나 낮게 간주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자 사이에 만약 이 비교급이 쓰인다면, 그것은 언제 어느날 달성될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고 다만 저 무한의 완전을 향해서 약진하는 그 속력 여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같이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보다도 속도가 나쁜 것이다. 우선 양쪽의 가르침이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덕의 제덕목(諸德目) 예를 들면 자제(自制)와 용기(勇氣)는 타 종교에서는 공덕을 구성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아무것도 그것을 쌓아 올리지 못한다. 이것이 양자의 가르침의 다른 점이다. 그러나 어느 길도 낮은 단계로부터 올라가지 않고서는 품성이나 덕목의 성취는 어렵고 저 완전을 향한 약진은 구할 수 없다. 이 사실은 타 종교나 기독교도 변함이 없다. 이것에는 양자가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타 종교의 신도와 같이 기독자는 처음부터 몸을 완전하게 하는 일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타 종교의 신도가 자제(自制)를 가지고 그것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마치 이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최초의 계단을 밟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타 종교 신도에게는 자제(自制) 그 자체가 품성을 구성하지만 기독자에게는 다만 저의 완전을 향한 대원망(大願望)의 불가결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 바로서 극기(克己)의 일부인 것이다. 참기독자의 표시는 타 종교에서 보여 주고 수행하는 도정(道程)과 같은 곳으로 오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만인 누구나 기독교를 해석하여 저 높은 곳에 도달하는 대원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가르침으로서 이것을 인정했다.
예컨대 카톨릭이나 희랍정교에 따르면 교회를 통해서 전해진 은총에 의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든가 또는 개신교도나 혁신교회(〔註〕 보통 이 말로 가르침을 받은 교파는 칼빈 교의(敎儀)에 따르고 그 교회정(敎會政)에는 장로주의를 지킨다)의 칼비니스트 등에 따르면 기독의 속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든가 혹은 다른 교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양쪽을 혼합한 것으로 구원을 설한다.
이 교의야 말로 기독교를 덕교(德敎)로서의 사람들이 갖는 진지성과 성실성을 파괴한 것이다. 가령 이 종류의 신앙의 대표자들의 구원의 의미는 결코 저들의 바른 생애에 대한 갈앙(渴仰)과 상용(相容)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와는 반대로 도리어 갈앙 그 자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또 다음 일은 어쨌든 어려운 일이다. 즉 일정한 소론(所論)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정의 연석(演釋)이 따르는 것이다.
가령 여기서 어떤 사람이 교회로부터 전해 받은 은총의 덕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가, 혹은 기독의 속죄의 덕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들에게는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다. 즉 바른 생애를 보내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노력은 불안한 것이 된다. 하물며 그가 자력(自力)으로 그를 다시 선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희망조차 죄라고 선고된다면 더욱 말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그가 죄와 벌(應報)에서 면제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자력(自力) 외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과 같이 도저히 정력과 열심을 같은 정도로 발휘해서 노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완전하고 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분투하지 않거나, 개인적 노력 이외의 다른 방법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선한 생애에 필요한 선품성(善品性)의 도달에 필수적인 순서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이것이 기독교를 입에 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자력(自力)이라는 것이 사람의 정신적 완전(完全)에 도달하는 일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하며, 그 획득에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는 교의(敎儀)는 선한 생애를 살려고 하는 노력의 이완을 가져오고 그런 생활에 불가결한 연쇄사항에 대해 무시 태만을 낳는다. 기독교를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만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여 이교적 덕목의 탐구로부터 놓여 나가기 위해 이단교에 교체해서 나타난 기독교의 신의 가호를 감사해 했다. 그와 같이 기독교에는 그 덕목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 동물성과의 투쟁으로부터 면제되기 위해서 그러한 경질를 기뻐했다.
이와 같은 일이 교회의 가르침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 그들은 앞에서 말한 신자와 같아서, 다만 다른 것은 교회에 근거해서 혹은 속죄에 의해서 사함을 받은 은총 대신에 다수자에 의해서 인용(認容)된 상상상의 선행, 예를 들면 과학이나 예술 혹은 인도(人道) 등에 관계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저 상상상(想像上)의 선행의 이름 아래, 선한 생애(生涯)에 필요한 품성에 대한 연쇄적 성취로부터 벗어나 마치 무대 위의 광대와 같이 선한 생애를 사는 흉내를 내는 것만을 가지고 만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게시물은 자연건강님에 의해 2013-06-19 15:54:37 2004년 11월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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