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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5면-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 자연건강
  • 2009-12-19 15: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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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

배 성 권

톨스토이가 채식주의라고 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근거에 의해서 어떤 주장을 가지고 채식주의를 실천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톨스토이가 어떤 확실한 주장을 내세우고 그 바탕 위에 서서 채식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저 성실하고 글 잘 쓰는 톨스토이가 그의 채식주의 사상에 관해서는 글을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러가지 논문에 아주 드물게 산재(散在)되어 있는 것 외에 별도로 자신의 등신대(等身大)보다 넘치는 톨스토이의 저작 중, 채식주의에 대한 글은 참으로 이채롭고 귀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는 금주·금연론자로서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마취시키는가」라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톨스토이의 정신 세계를 여실하게 엿볼 수 있는 이런 글을 통해서 첫째로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해서까지 철저히 생각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의 진지한 성품에 대하여 머리가 숙여진다. 진실로 그는 이렇게 양심에 철저하여, 긍극에까지 밀어부치고 생각에 몰두하지 않고서는 참지 못하는 그의 내적생활(정신적 생활)의 벅차고 풍요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 점 부끄러움 없이」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일견 사소한 작은 일로 보일지 모르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잠시도, 촌각(寸刻)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찌기 서양인들 중에는 육식의 폐해를 실감하고 채식을 권장하며 금육생활을 권장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역사적으로 기라성 같은 철인, 문학자, 예술인, 사상가, 종교인 등 훌륭한 분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지만, 우선 여기서는 그 중에서 몇 분만 소개해 볼까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피타고라스, 세네카, 알버트 아인슈타인, 밥딜런, 알코트, 성 임스, 데이빗, 소로우, 에머슨, 성 프랜시스, 벤자민 프랭크린, 성 어거스틴, 바그너, 아포르니오, 그레고리오스, 실렐, 알렌산더 포프, 오빗, 아이작 뉴톤, 웰즈, 캔디스 베겐, 마하트마 간디, 타고르, 볼테르, 장자크 루소, 존 밀턴, 찰스 다윈, 싱클레어, 제임스 코번, 버나드 쇼, 달라이 라마 등…
최근에 와서 젊은 채식주의자를 소개하면 18세에 NASA에 들어간 청년 물리학자 풀라네겐 박사 부부를 들 수 있다. 게다가 부인은 권위 있는 영양학자로 역시 부군과 버금가는 채식주의자로서 영양학 박사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채식주의자로서 그의 민화집을 보면 「사람이 빵으로는 살 수 없다」 등 많은 인도주의적 작품이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동양의 불교 사상에도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 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톨스토이가 완전히 감격했다는 경전 중에, 인간의 오욕(五欲 : 식욕, 애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을 그린 「흰 쥐와 검은 쥐」의 일화가 들어 있는 『비유경』이 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심각한 비유이므로 여기에 소개해 보려고 한다.
「옛날 어느 곳에 한 사람의 나그네가 살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나운 미친 코끼리(狂象) 한 마리를 만났다. 깜짝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넓고 넓은 광야이기 때문에 숨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들판 한가운데 오래된 낡은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속에는 한가닥 등나무 줄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늘이 내려 주신거라고 기뻐하면서 나그네는 급히 그 등나무 줄기를 타고 우물 속에 들어갔다. 미친 코끼리는 무서운 상아를 곤두세우고 우물 속을 굽어 보고 있었다.
마침 다행이라고 할까. 나그네가 한숨을 들이 쉬고 있는데 우물 밑바닥에는 무서운 큰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나그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놀라서 주위를 돌아 보니 또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면서 당장이라도 나그네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한가닥 등나무 넝쿨 뿐이었다. 그러나 등나무 줄기도 잘 보니 흰 쥐와 검은 쥐 두마리가 번갈아 갉아 먹고 있지 않겠는가. 이미 만사는 끝장이다. 전혀 산사람의 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끔씩 등나무 넝쿨 뿌리에 쳐 놓은 벌집에서 단 꿀물이 똑 똑 한 방울 한 방울 세방울 다섯 방울이 그의 입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마치 이것은 감로(甘露)와 같은 꿀맛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그네는 어느덧 눈앞에 무서운 위험도 잊어버리고 그저 또 한 방울의 꿀만을 먹고 싶어서 그것을 갈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광야를 헤매는 나그네야 말로 우리들 모두 중생을 말하는 것이고, 한 마리의 미친 코끼리는 「무상(無常)의 바람」, 즉 흐르는 시간이다. 우물은 생사(生死)의 심연을 말한다. 생사의 간두이다. 우물 바닥의 큰 구렁이는 죽음의 그림자이다. 네 마리의 독사는 우리들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의 원소(地, 水, 火, 風)이다. 등넝쿨이란 우리들의 생명이다. 생명의 줄이다. 흑백 두 마리의 쥐는 밤과 낮 주야를 말한다. 다섯 방울의 꿀물이란 오욕(五欲)을 이른다. 관능적 욕망이다.
참으로 한번 이 교묘한 인생의 비유를 들으면 파사익왕이 아닐지라도, 톨스토이가 아니더라도 역력히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구도(求道)의 나그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톨스토이가 묘사하고 있는 처참한 도살장의 모습을 보면 전율과 함께 인간이 무엇이길래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사람을 위한다는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명목으로 살육해야 하는 것인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땐가는 자연이 인간을 향해서 보복의 역습을 해 올 것이 틀림없다. 그것의 징조가 지금 에이즈보다 무섭다고 하는 광우병(狂牛病) 등이 아니겠는가. 기상의 변화, 기후의 악화, 공해의 만연 등으로 이제 자연의 역습이 가까워져 왔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또한 톨스토이는 영국의 작가 폴 카루스(Paul Carus)의 「카르마」 즉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그 결과를 받는다는 이야기로 구성된 「업보」의 서문을 쓰고 있는데, 이 글이 다 끝나고 나면 이어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톨스토이의 채식주의 사상에 대하여 가능한 데까지 그 의 말 그대로를 인용하는 방법으로서 서술해 나가려고 한다.(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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