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 아 안중근 의사 92죽 추모 대재
- 자연건강
- 2009-12-19 1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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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중근 의사! 조국을 가슴으로 느껴본 감격의 한때
-안중근 의사 92주기 추모대재(中國旅順)에 다녀와서-
김 동 극
지난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현장인 중국 여순(旅順) 형무소에서 봉행된 안중근 의사 순국 92주기 추모대제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의 기회가 있었다.
나는 30여 차례의 세계 각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바 관광여행이 아니라는데서 자그마한 긍지를 지녀왔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닌 가슴 벅찬 감동의 기회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조국을 가슴으로 느껴본 감격의 한 때였다는 것이다.
북경(北京)에서 비행기로 1시간 쯤 날아 비행장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 거리인 여순(旅順)으로 달렸다. 현장이 가까워오자 주재사인 박삼중 스님의 안중근 의사 투쟁사에 관한 말씀이 있었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 말씀으로 더욱 소상하게 알게 되어 ‘새로운 감동’속에 현장에 다달았다.
이 형무소는 건물이나 시설은 옛 그대로 보존하면서 역사교육 산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바 외국인의 출입은 제한하고 있는데 한국인에게는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박삼중 스님은 수년 전부터 교섭이 잘 이루어져서 감옥 안에 안의사의 추모비까지 세워놓고 수차에 걸쳐 추모제까지 봉행해 오고 있다고 한다.
당일은 공교롭게도 그 지방 노동자들의 데모가 있어 이 감옥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으나 끈질긴 교섭 끝에 간신히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얻었다.
낡고 음산한 시설내부를 돌아 안의사가 갇혔던 감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초라한 나무침대와 지필묵(紙筆墨)이 정돈되어 있었고 그 감방 입구에는 중국말과 한국말로 된 안의사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어서 다다른 곳이 형장(교수대)이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두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조국을 가슴으로 느껴본 감격의 순간이었다.
안의사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데 집은 부유해서 자유로운 환경에서 면학(勉學)하는 한편 엽총으로 사냥을 즐기면서 글씨를 취미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즐겨왔다고 하는데 독립운동가인 부친이 별세하자 깨달은 바 있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그 좋아하던 술마저 끊겠다고 부친의 영전에 맹세하고 가산을 정리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독립운동가) 양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의 술책이 급박함을 깨닫고 직접적인 무력투쟁을 결심하여 손수 의병을 모아 독립군으로 편입하여 그 참모준장으로 임명되어 「울러지보스톡」 일대를 중심으로 무력투쟁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중무장한 일본의 정예부대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3년간의 전투는 악전고투의 연속으로 의병들은 병들고 죽고 전사하고, 병사하고, 굶어 죽고, 얼어죽어 살아남은 일부 의병만으로서는 더 싸울 수 있는 여건이 안되어 일단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일본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다렸던 것이다.
1909년 3월 26일 오전 9시 30분! 열차에서 막내려 마중 나온 각국 요인들의 환영행렬 앞에 나타난 「이토오」의 가슴팍에 난데없는 총소리와 함께 의탄 3발이 명중되었던 것이다. 「이토오」는 말한마디 못하고 즉사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의거였다. 일본, 중국, 러시아 관헌의 삼엄한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4m 앞까지 접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코리아 우리! 만세! 만세! 소리는 총성에 이어 할빈 플랫폼을 뒤흔들었고 즉시 체포된 안의사는 초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여순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옥중생활은 너무도 의연하고 담당간수(일본헌병)와 검찰관과 형무소장이 모두 감동하여 그에게 지필묵을 제공하여 여가를 활용케 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양평화론」을 끝맺지 못한 채 처형된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는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독립투쟁중 적의 원흉을 사살하고 잡힌 포로」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토오」의 죄상을 15개조로 요약 주장해온 바 그 논리 정연한 주장에 담당 검찰관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는 상소(上訴)의 기회도 있었으나 그 모친의 뜻(비좁은 상소는 그만두라…)에 따라 상소를 포기하고 초연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7면>
안의사의 투쟁 생활중 우리를 감동케 하는 일화가 많이 있으나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한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어느 유격전투 중 승전하여 일본군 포로를 수명 붙잡았는데 그들이 살려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애원했지만 병사(독립군)들은 모처럼 잡은 포로라 한풀이라도 하려고 서두르고 있는데 안의사는 「이 사병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이들도 고향에 부모 처자가 있는데 여기 오고 싶어서 왔겠느냐?」라고 한사코 항변하는 병사(독립군)들을 타일러 무기와 총알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돌려보낸 사실은 참으로 차원 높은 인품(人品)을 짐작하게 한다.
안중근 의사의 담당 간수이었던 「지바도시치」는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안의사의 영정을 모셔놓고 조석으로 예배를 해왔고 그의 사후에는 인근(지바현(縣) 다이린지(大林寺))에 봉안하게 되었는데 그 절의 주지인 「사이또 다이켄」은 담당 간수 치바에게 얻은 감동적 자료를 중심으로 「내 마음의 안중근」이란 책을 발간한 바 안의사의 인품과 투쟁사가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 치바현 지사(知事)는 다이린지 뜰에 안의사의 추모비까지 세워놓았는데 안의사의 기일(忌日)에는 일본인 추모객이 수 백명씩이나 모인다고 한다.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렸더니 바로 그 날 신문에 금강산 여행을 학생들에게 여비를 보태주어 가면서 정부가 권장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는 순간 그것도 좋겠지만 그와 함께 여순 형무소의 견학도 그렇게 권장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거기(여순)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추모관)을 세워 놓고 우리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정하여 5~6일 합숙하면서 산역사 교육과 모필 경서대회, 백일장 등을 개최하여 애국의식을 고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몇 곳의 관광도 하게 할 수는 없을까… 나는 기회가 있으면 관계 요로에 이러한 건의를 해 볼 각오를 굳히고 있다.
나는 이번 기회의 체험을 통하여 이보다 더 효과적인 애국교육은 없을 것이라고 가슴 깊이 확신하고 있다. 세계 평화와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우리 자연건강법은 정신적인 자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강의 4대 영역 중에서 정신 영역이 심신의 건강을 통솔하는 으뜸가는 요소라고 생각할 때 그 중에서도 선열을 공경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정신적 자세가 건강의 정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사 교육학박사 수봉재활원 원장)
마카족 인디언의 기도
내 무덤 가에 서서 울지 마오.
그 곳에 나는 없다오.
그 곳에서 난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끝없이 부는 한 조각 바람이라오.
눈 위에 번쩍이는 다이아몬드 섬광이라오.
영글은 곡식위에 쏟아지는 찬란한 햇살이라오.
보슬보슬 내리는 촉촉한 가을비라오.
고요한 아침에 그대가 눈을 뜨면
소리없이 하늘에 원을 그리며
자유로이 노니는 한가한
새들의 물결이라오.
밤이면 쏟아지는 부드러운 별빛이라오.
내 무덤 가에 서서 울지 마오.
그 곳엔 난 없다오.
그 곳에서 난 잠든게 아니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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